DGSAA(대구경북학생산악연맹, Daegu-Gyeongbuk Student Alpine Association) 멤버들은 제주도에서 111km를 달리는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지난 2년을 돌이켜 보면 무엇인가를 함께 한다는 것만으로 그저 즐겁고 소중한 시간임을 이들의 도전을 보면서 다시 느끼게 되었습니다.
모두 학생이었던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우린 틈만 나면 산에서 모였다. 함께 땀 흘리고, 자일을 묶고, 술잔을 기울이며 산과 그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행위와 관계 모두에 취해있었다. 질리도록 산에 가는 것 밖에 모르던 우리도 사회의 구성원으로 일해야 될 때가 가까워졌기에 재학생으로서의 마지막 원정을 다녀오는 것으로 철없는 시간을 잠깐 매듭지었다.
각자 취업 준비를 하거나 취업을 하게 돼 점점 흩어지면서 모이기가 힘들어진데다 코로나까지 확산하면서 별일 없으면 만났던 우리는 별일을 만들어야 겨우 볼 수 있었고 그렇게 만나도 마음 한구석에 아쉬움이 남았다. 시간이 흐르고 변화된 각자의 삶에 적응해가고 있을 때, 일본으로 취업했던 홍석이가 돌아온다고 했다. 이때다 싶었던 교정이가 기념으로 프로젝트를 하자고 하니 걱정 반 기대 반이었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을 벌일지 몇 마디 대화가 있었던 것 같은데 나도 모르는 사이 우리는 제주도를 111km 달리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1년 전부터 교정이는 우리가 이제 예전처럼 함께 시간을 맞춰 떠나기 힘들기 때문에 언제든지 갈 수 있는 순간이 생기면 원정이든 뭐든 바로 떠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런 이유로 매주 달리기 할당량을 채워야하는 내기를 해왔는데, 그냥 수단인 줄 알았던 달리기를 목표로 정하다니. 예상치 못했던 프로젝트라 당황스러웠다. 그래도 역시 교정이답게 평범하지 않고 터무니없는 것이 재미있을 것 같았다.
나는 제주도가 처음이라 제주하면 한라산, 귤, 돌하르방 같은 것들과 따뜻한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제주도의 첫인상을 궁금해하며 비행기 밖으로 나섰지만 가장 먼저 맞아주는 것은 나를 어딘가로 연행해갈 것 같은 강풍이었다. (멀뚱멀뚱 서서 뭐해! 빨리 끌어내려!) 일기예보를 보고도 대충 챙겼던 짐을 생각하니 한숨이 나왔다.
공항에서 홍석이를 거의 3년만에 만났지만 오랜만이라는 느낌이 없었다. 잔잔했던 재회 뒤에 내일 달리면서 먹을거리를 장봤다. 인원이 많고 하루종일 달려야 하니 많은게 좋겠다 싶어 시원시원하게 담았지만 괜히 부족해 보였다.
숙소로 한 명씩 모여들고 내일의 달리기에 대한 기대와 걱정을 나누다보니 숙소는 상기된 공기로 가득 찼고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생각보다 늦어진 시간에 오늘 자는 것부터 달리기의 시작이라는 의무감으로 서둘러 잠자리로 향했다. 달리기에 집중할 수 있도록 편의를 봐주시는 선배님들 덕분에 걱정없이 잠들 수 있었다.
잠에 들고 겨우 4시간이 지났지만 그전과는 다르게 곳곳에 퍼진 긴장감이 우리를 깨웠다.개운하지 않은 몸을 겨우 끌고 연료를 조금이라도 더 채우기 위해 식탁에 앉았다. 창밖은 깜깜한 어둠으로 가득 찼지만 굵은 빗줄기만은 선명하게 보였다. 날카로운 바람소리도 어디 나와보라는 듯이 위협했다. 생각보다 심했지만 비 예보도 알고 있었고 시원하니 갈증도 안나겠거니 별로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떤지 확인하려고 문을 연 순간 밀려오는 한기에 내 생각이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군가 저체온증에 걸리는 상상과 함께 이대로 출발해도 괜찮을지에 대한 걱정이 밀려들었다. 교정이는 덤덤했다. 계획대로 오늘 완주를 목표로 한다면 출발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파이팅을 외치며 뛰쳐나갔다.
달리기 시작하기 무섭게 흠뻑 젖어버렸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신발에선 질척거리며 물이 나왔고, 축축하고 무거워진 옷은 차갑게 들러붙었다. 찝찝함에 기분 나쁠만한 상황인데도 제대로 젖어버려서일까 오히려 불쾌하지 않았다. 이렇게 비를 맞으며 같이 달리고 있으니 신입생 시절 설악산 하계 훈련에서 형들과 함께 우중 구보를 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비오니까 달리기 좋겠다며 생각지 못하게 구보를 했었는데, 기대하지 않았던 상황에 힘들기도 했지만 오래 기억에 남는 것 같다. 오늘도 그런 순간이 되겠지.
새벽이라 깜깜한 어둠 속에 랜턴 불빛에 의존해 달리는 모습을 생각했지만, 가로등 불빛이 환해 편하게 갈 수 있었지만 낭만은 떨어지는 것 같다. 해안에 가까워질수록 바람에 펄럭이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정신없게 들려왔고, 바로 옆에 보이는 새까만 바다는 높은 파도로 위협하다 긴장이 풀리는 순간 우리를 삼켜버릴 것만 같다.
막 출발해서 이런저런 감상을 느끼다 보니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고 거리도 금방 늘어나는 것 같았다. 웬 차량이 가까워져 우리가 신기해서 쳐다보는 줄 알았는데 지원차량이었다. 이렇게 일찍 나왔을거라 생각을 못해 너무 반가웠던 나머지 차에 바짝 붙어 오버페이스인 줄도 모르고 달렸다.
거리가 긴 만큼 우리는 약 10km마다 CP를 두고 체력을 보충하기로 했다. 첫 번째 CP에 도착했지만 여전히 추운 날씨에 젖어 있는 몸이 금방 식었다. 체력을 많이 뺏기지 않기 위해 짧은 정비를 마치고 발길을 서둘렀다.우리 앞은 관광지로 유명하다는 애월. 에메랄드 빛으로 유명하다던 애월 바다는 날씨 탓에 탁하기만 했다. 해안을 따라 멋지게 들어선 펜션, 게스트하우스와 카페들이 늘어선 것을 보고 이곳이 관광지구나 생각이 들었다.
점점 잦아드는 비에 기분이 좋아졌다. 주변을 구경하며 즐기다보니 두 번째 CP인 편의점에 금방 도착했다. 너무 감사하게도 선배님들이 미리 뜨끈한 음료와 스프를 준비해놓으셨다. 홀린 듯이 스프를 한 숟가락 물었는데 너무 뜨거워 목구멍이 화들짝 놀랬다. 그런데도 고소하고 짭짤한 맛과 뜨거움이 주는 짜릿함에 스프로 가는 손이 멈추질 않는다.
몸도 덥혔겠다 비도 거의 그치고 기온도 올라서 옷을 갈아입어도 괜찮겠다. 그런데 달릴 때는 멀쩡하던 무릎이 엄청나게 시려왔다. 무릎을 내놓고 달려서일까. 겨울에도 이런적이 없었는데 벌써 무릎이 아파서 끝까지 달릴 수 있을까 싶었다. 다리 부상이 있었던 민철이형은 상태가 나빠져 여기서 잠시 쉬기로 했다. 어쩔 수 없지만 같이 뛰다 우리끼리만 뛰려고 하니 아쉽기도, 미안하기도 했다. 몸 상태가 안 좋은데도 먼 길을 와서 함께 달리고 도와주는 모습이 멋지고 대단했다. 역시 형이다.
점점 맑아지는 날씨에 우리 기분도 같이 맑아졌다. 시작이 워낙 극적이었고, 어두운 날씨에 우리 얼굴이 굳어있었는데, 다들 신나 보인다. 금방 따라붙은 지원차량과 함께 좋아진 기분 덕에 신나게 달려 페이스가 빨라졌다. 재미는 있었지만 앞길이 많이 남았기에 페이스 조절에 신경써야 될 것 같았다.
날씨도 몸도 풀려 상쾌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던 나는 세 번째 CP인 협재해수욕장에 다와서 신나있었다. 하지만 교정이는 지암이의 무릎 상태가 안 좋아진 것을 바로 알아차렸다. 당연히 잘 달리고 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한 명씩 힘들어하는 모습에 나도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주위를 보는데 소홀해진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됐다.
제주도가 달리기 좋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었는데 달리면서 점점 그 뜻이 와닿았다. 신호 걱정없이 마음편히 달릴 수 있는 것은 당연하고, 사납고 어두운 바다는 에메랄드빛을 띄기도 하고 깎아지른 해안절벽은 아찔함과 시원함을 동시에 준다. 아기자기한 돌담길과 야자수, 유채꽃이 펼쳐졌다가 백년초밭으로 이어지며 시시때때로 달라지는 풍경은 힘이 드는 것을 느낄 틈을 주지 않는다. 게다가 어디에 있어도 탁 트인 시야가 속을 시원하게 만들어 멋진 풍경속으로 파고들고 싶은 마음에 계속 달리고 싶게 만든다. 감상에 한 껏 빠져있으면 가끔 지금 달리기가 별건가 마음만 먹으면 완주가 별 것 아닌 것 같은 자만이 가득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4번째 CP에 도착하면서 달린 거리는 풀코스를 넘겼다. 그런데도 남은 거리는 막막하다. 풀코스 두 번 정도는 더 뛰어야하네... 근처에 어떤 다리가 유명하다고 하는데 여태까지 왔던 길이 충분히 멋졌기 때문에 굳이 안봐도 될 것 같다. 움직이기 힘들어서는 절대 아니다. 다음 구간은 촬영을 담당하는 홍석이와 함께 뛰었다. 홍석이와 함께 뛰니 새로 달리기를 시작한듯 분위기가 다시 살아났다.
당산봉이라는 작은 봉우리의 짧은 트레일 루트를 달리며 촬영을 겸하느라 시간은 더 걸렸지만 자연 속에서 편하게 쉬었다 가는 느낌이라 편안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곳을 지나 아스팔트길로 내려오자마자 급격하게 지쳤다. 조금만 힘내면 다음 CP에서 점심으로 먹을 국밥이 기다리고 있다.
국밥을 향해 달려가면서 나는 짧지만 그동안의 달리기 경험에서 느낀 교훈을 상기시키게 됐다. 그것은 목표 자체가 목표여서는 목표에 다다라서 힘들어진다는 것이다. 목표에 다 왔다고 생각하는 순간 끝을 생각하게 되고, 이제 조금만 노력하면 그만해도 된다는 생각이 지배적으로 들게 된다. 결과적으로 ‘그만하고 싶다’는 상태에 집중하게 돼 얼마 안 남은 목표가 배로 힘들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동안 다왔다라는 말로 많은 사람들에게 고문을 해왔던 스스로를 반성했다. 어쨌든 국밥을 향한 5km는 지나온 50km보다 길고 힘들게 느껴졌다.
마을회관의 분위기를 풍기는 신도포구 CP의 정자에서 국밥을 먹었다. 늦게 도착해서 조금 식었는데도 꿀맛이다. 쌀쌀한 날씨, 지친 몸에 국밥이 뜨끈했다면 한 그릇 더 먹자고 식당으로 달려갔을 것만 같다. 맛있는 식사를 준비해놓으신 선배님들께 감사하면서 문득 우리는 너무 호화롭고 편안한 달리기를 하고 있다고 느꼈다. 본인의 시간을 내 제주도까지 와서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주고 있는 선배님들이 너무 감사하고 대단하게 느껴졌다.
국밥에 감격했는지 다리는 더 이상 움직이기 싫다고 강하게 자기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달려보려해도 말 그대로 ‘못’ 달린다. 평범하게 걷는 것조차 쉽지 않았고 절뚝거리기 시작했다. 이제 겨우 절반정도 왔는데 막막하다. 다들 비슷한 상황이라 1~2km를 걸은 후 다리를 억지로 움직였다. 못 움직이겠다 시위하던 다리도 화가 조금 풀렸는지 조금씩 움직여졌다. 죽어가는 불씨를 살리듯 다리에 온 신경을 써서 달리게 만들었다. 한 번 달리기 시작하니 계속 달릴 수 있었다. 하지만 뒤에서 걸어오는 친구들과 속도를 맞추기 위해 잠시 걸었더니 다시 달리기 힘들었다. 아. 앞으로 멈추면 안되겠구나. 동욱이도 나와 상태가 비슷해 일부러 걷지 않고 계속 뛰었다. 그런데 희한하게 뛸수록 힘이 더 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CP인 모슬포항에 도착해서는 컨디션이 완전히 돌아온 것 같았다. 기운이 나니까 간식도 일부러 많이 먹으려 했다. 나는 전투적으로 먹고 있는데 다들 뭘 먹지도 않고 어딘가 침체된 분위기가 느껴져 걱정이 됐다.
무념무상으로 달리기를 이어갔다. 주변 경치가 어떤지도 감흥이 없어졌고 여기가 어딘지도 상관없었다. 관성에 몸을 맡기고 조용히 달리기만 했다. 그렇게 달리다 보니 갑자기 한없이 평화로운 기분이 들었다.
조용한 도로 위엔 우리만 차박차박 발소리를 내고 있었고, 길 양쪽으로 유채꽃이 넓게 피어있었다. 저 멀리 산방산이 혼자 우뚝 서있는 모습은 왠지 모를 통쾌함을 주었다. 기분 전환이 되니까 다시 즐거워졌다. 고요한 평화 속에서 자전거 무리가 지나가며 내는 체인 소리가 정겨웠고, 때때로 지나가는 자동차는 영화처럼 앞에 멈춰 히치하이킹을 해주겠다며 말을 걸 것 같았다. 들판 위에서 풀을 뜯고 있는 말이 신기했고, 햇살도 따뜻했다. 모든 것이 조화롭게 느껴져 둥실둥실 떠 있는 구름도 우리와 함께 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언덕 위로 홍석이와 민철이형이 보였다. 송악산에 다 왔구나! 한껏 기분이 좋아진 와중에 펼쳐지는 풍경은 나를 더욱 놀라게 했다. 시야가 언덕을 넘어서면서부터 언덕에 가려 보이지 않던 광활한 바다가 한순간에 펼쳐졌다. 왼쪽엔 산방산이 우뚝 솟아있고, 오른쪽엔 송악산이 절벽을 드러내 한없이 시원한 느낌을 선사했다. 북적이는 해변은 어떤 매체에서 봤을법한 먼 이국의 여행지에 온 듯한 느낌을 줬다.
체력 관리를 위해 송악산은 살살 걸어 올라갔다. 멋진 절벽에서 드론으로 찍힌 우리의 모습이 절로 궁금해졌다. 흔하게 보이는 풀을 뜯고 있는 말의 모습에서 익숙함이 느껴졌다. 노래방 배경에서 봤던 모습일까.
여유롭게 달려왔지만 송악산을 내려오면서 시간을 계산해보니 더 이상 여유를 즐길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대로면 자정이 다 돼서야 완주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CP마다 너무 길게 휴식해 불필요한 시간을 소모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둘러야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멀리서 봤던 것과 같이 사계해변은 북적거리고 붐비는 모습이 국내의 여느 해변과 비슷해 보였지만 왠지 외국인이 파라솔을 펼치고 선베드에 누워있을 것 같은 이미지였다. 하지만 내 마음엔 이미 조급함이 가득 차 해변의 분위기를 즐길 수 있는 여유가 남아있지 않았다. 앞으로 풀코스만큼의 거리도 안 남았다고 파이팅을 외치면서도 편하게 쉬기보다 걸어가면서 체력을 보충하자고 재촉하며 발걸음을 서둘렀다.
노을지는 하늘 아래로 낮은 주택들이 들어찬 오르막길을 올랐다. 오밀조밀한 모습이 부산의 달맞이길을 떠오르게 해 또 한 번 제주도의 다채로움에 놀랐다. 산방산을 스쳐 지나가면서 우리는 산악부답게 여기 등반할 수 있을까와 같은 이야기와 함께 상상 속에서 수 차례 등반을 마쳤다.
어둠이 내려앉은 후 다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여태 달려왔던 길의 대부분이 도로였지만 별로 딱딱한 느낌이 들진 않았었는데, 이제는 정말 차가운 아스팔트로 느껴졌다. 도시의 느낌이 강해져서 그런 것 같다.
사계해변에서 한참을 온 것 같은데 겨우 5km를 지났다. 막막함을 느끼고 있는 와중에 지원차량이 지나가며 두 번째 세븐일레븐이 CP라고 했다. 5km 남았다고 하면 멀게 느껴지지만 왠지 두 번째 세븐일레븐은 가깝게 느껴졌다. 속인 사람은 없었지만 우리는 스스로 희망고문을 시작했다. 쭉 뻗은 오르막길은 다 올라왔겠지라는 생각을 몇 번이나 반복하게 만들었는데도 여전히 끝이 날 생각을 안했다. 나는 우리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게 아닐까 의심했고 길고 긴 고통의 시간이 이어졌다.
몇 번이나 실망했을까. 드디어 첫 번째 세븐일레븐이 보였다. 여러번의 좌절을 맛본 나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동훈이는 여기가 CP인 줄 알고 있는게 웃기다. 아서라. 아직 하나 남았다. 다행스럽게도 다음 세븐일레븐까지 그리 멀지 않았고 실망감 없이 도착할 수 있었다. 여태 CP에 도착할 때마다 항상 반가운 마음이 들었었는데, 이제 감정을 상실한 것 같다.
이제 겨우 하프만큼의 거리가 남았는데, 완주는 분명히 할 수 있을 것 같고 내 상태도 비교적 괜찮다는 생각이 드는데도 의욕이 없어졌다. 체력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만 같다. 의무감 속에 말없이 입에 뭔가 집어넣기만을 반복했다.
많이 올라온 만큼 앞으로는 내리막길이라 다행이었다. 바다도 보이지 않고 가로등만 늘어서 있는 어두운 도로를 가다보니 정말 이곳이 제주도인지 어딘지, 시간은 어떻게 가는지 모르겠다. 별로 움직이지도 못했는데 시계는 9시를 가리켰다.
남은 거리가 체감되는 시점부터 남은 거리가 세 배는 느리게 줄어드는 것 같다. 국밥 먹으러 갈 때와 같은 이유일텐데 앞으로 남은 거리가 더 많으니 더 큰 고통이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마음은 빨리 뛰어가서 이 지긋지긋한 달리기를 끝내버리고 싶은데 몸이 움직여주질 않아 답답했다. 동훈이 말처럼 1km 7~8분 페이스가 이렇게 빠르게 느껴졌던가.
이어지는 내리막에서 나는 중력에 몸을 맡겨버렸다. 한 번 속도를 내니 몸이 풀리고 잘 달려졌다. 나는 고삐가 풀려 마음가는대로 혼자 달려 가버렸다. 그대로 3km 남은 다음 CP까지 내달린 후 편히 쉬며 기다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달려가길 잠시, 기다리는 지원조의 눈에 내가 혼자 들어오는 모습이 보인다면 너무 실망스러울 것 같았다. ‘그래, 우리는 다 같이 뛰려고 왔지’ 마음을 가다듬고 후미에서 힘들어하고 있는 동욱이를 기다렸다. 마음이 훨씬 편해졌다.
마지막 CP에 도착했다. 끝이 코앞에 보였지만 힘이 나지 않았다. 끝을 기대하지 않게 된 것 같다. 교정이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100km면 100km지 111km는 뭘까. 다시 입에 대기도 싫은 아미노바이탈과 간식들을 억지로 털어넣었다. 남은 거리는 9km. 모두 함께 달리기 위해 계획을 약간 틀어 지원차량을 두고 4.5km를 왕복해 회귀하기로 했다. 출발 한 후에 추워서 입고 있던 옷을 갖다 놓으러 차로 돌아갔다. 시계의 거리가 모자란 동훈이도 거리를 채우려고 일부러 함께 움직였다.
짧은 시간이었는데 다시 돌아가니 아무도 보이지 않아 걱정했지만, 조금 가다보니 동욱이와 민철이형이 보였다. 더 앞서 가버린 사람들을 따라 동훈이와 민철이형은 달려가버렸다. 동욱이만 덩그러니 남겨졌다.
따라서 뛰어가고 싶은데 동욱이 상태가 이상했다. 체력이 다 떨어졌는지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상태가 걱정되는데 포기하라고 할 수도 두고 갈 수도 끝까지 가보자고 할 수도 없었다. 억지로 끝까지 데려갔다 오히려 나쁜 상황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 머릿속은 핸드폰을 두고 왔는데 혹시 쓰러지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으로 가득했다.
동욱이를 챙기면서 걷고 있다보니 힘들다기보다 졸면서 걷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괜찮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니 조금 열이 올랐다. 마지막 순간에 와서 졸고 있다니... 대충 가다보면 끝이 난다고 안일하게 생각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정신이 번쩍들게 따끔한 소리를 해주고 싶었지만 그건 내 기준이고 동욱이는 이미 한계를 넘어왔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생각을 고쳤다. 약한 소리를 반복할 때면 혼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잠을 깨우기 위해 계속 자극했다. 따뜻해서인 것 같다고 옷을 벗고서야 잠에서 깼다.
겨우 달리기 시작했지만 그동안 앞서간 사람들은 얼마나 멀어졌을까. 시계는 먹통이 되어 남은 거리가 가늠되지 않았다. 시간도, 거리도 짐작되지 않고 막연히 이제 끝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자 시공간이 늘어져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앞서간 사람들이 반환점을 찍고 돌아오는 것이 보이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면 이 시간과 정신의 방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
앞에 걸어가고 있던 민철이형과 지암이를 만나고서야 깜깜한 터널 속에서 한 줄기 빛이 내린 것 같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실망스러웠다. 이미 많이 온 것 같은데 돌아오는 중이 아니라 아직도 가고 있구나. 지암이가 돌아섰다. 이제 감당할 수 있는 양이 주어진 것 같아 마음이 편해졌다. 한 번 지나온 길이라 더 짧게 느껴지는 걸까 남은 거리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마지막 1km를 남긴 지점에서 먼저 간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함께 천천히 걸어가며 마지막을 즐긴다. 그간 쌓여있던 소감을 쏟아냈다. 마지막 10km는 대부분을 걸었음에도 100km만큼 힘들게 느껴졌다는 감상을 내놓았다.
완주를 한 후의 느낌은 해냈다 라는 성취감보다는 이제 더 이상 안가도 된다는 것에서 오는 안도감이 컸다. 20시간 가까이 걸려 111km를 왔다. 바로 얼마 전인데도 실감이 나지 않았고 이미 먼 과거같이 느껴졌다.
다시 같은 행위를 하지 못할 것만 같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을 묵묵히 운전을 해준 민철이형도 고맙고 대단하다. 우리를 위해 저녁을 준비해주신 선배님들도 너무 감사하다. 완주 하는데는 지원조의 지원 절반 이상이였다고 생각한다. 꿈 같은 시간이었다.
이 프로젝트를 준비하면서 안 본 사이에 다들 멋있게 변했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런데 함께 달리면서 보니 다들 변한게 없었다. 단지 서로 가까이 있어서 몰랐지만 조금 떨어져서 보면 다들 멋있는 사람이였구나. 모두에게 수고했다 라는 말보다 참 지독하다고 전하고 싶다. 이번 프로젝트는 다시 철없는 시간을 보낼 때가 왔다는 신호탄이 된 것 같다.
"그래. 우리 다음엔 또 뭐할까?"
김세옥
DGSS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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