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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날은 계획대로였습니다

여름 백패킹은 처음부터 끝까지 순조로웠습니다. 루트도 익숙했고, 날씨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체력이었습니다.

 

장거리 산행에서 체력 안배에 실패하면 후반부가 무너집니다. 다리가 무거워지고 판단이 느려지고, 무엇보다 속도가 떨어집니다. 해가 지기 전에 캠프에 닿아야 했지만, 일행은 예상보다 훨씬 늦게 도착했습니다. 이미 밤이었습니

니다.

 

지치고 배고픈 상태로 텐트를 쳤습니다. 하루 종일 땀으로 흠뻑 젖은 옷을 그대로 입은 채였습니다.

 

2. 신호는 이미 와 있었습니다

텐트 안에서 급하게 식사를 했습니다. 그게 실수였습니다.

 

지쳐 있는 몸에 갑작스러운 식사는 소화를 위해 혈액을 내장으로 집중시킵니다. 그 순간 말초로 가는 혈류가 줄어들고, 체온을 유지하는 능력이 잠깐 떨어집니다. 젖은 옷이 몸에 붙어 있었고, 밤의 기온은 계속 내려가고 있었습

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명이 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더니 몸 전체에 떨림이 왔습니다. 눈의 초점이 흐려졌고, 말에서 힘이 빠졌습니다.

 

저체온증이었습니다.

 

3. 처치는 단순했지만, 판단이 먼저였습니다

이 순간 가장 중요한 것은 손을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이 상황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판단하는 것 입니다.

 

환자의 상태를 빠르게 확인했습니다. 의식은 있는가, 떨림의 정도는 어떤가, 말은 하는가. 이 세 가지만으로도 저체온증의 단계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습니다.

 

'의식이 있고, 떨림이 있고, 말은 하지만 힘이 없다.' 경증이었습니다. 현장에서 처치가 가능한 상태였습니다. 판단이 끝난 뒤에야 처치를 시작했습니다.

 

가장 먼저 한 것은 젖은 옷을 벗기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 순간 망설입니다. 추운 환경에서 옷을 벗기면 더 춥지 않을까, 하고요. 하지만 젖은 옷은 체온을 빼앗는 속도가 건조한 공기보다 25배 이상 빠릅니다.

 

그 옷을 그대로 두는 것이 오히려 더 위험합니다.여분의 옷이 없었습니다. 대신 First aid kit이 있었기에 이머전시 블랭킷으로 먼저 몸을 감싸 복사열을 반사시키고, 그 위에 침낭을 덮었습니다. 지면과의 단열도 확인했습니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는 생각보다 빠르게 체온을 빼앗습니다.

 

환자를 눕히고, 스스로 삼킬 수 있는 상태라면 따뜻한 물을 천천히 마시게 했습니다. 억지로 움직이게 하지 않았습니다. 저체온증 상태에서 갑작스러운 움직임은 차가워진 말초 혈액을 심장으로 한꺼번에 보내 부정맥(맥박이 불규

칙 해지는 상태)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40~50분이 지나면서 떨림이 줄었습니다. 눈에 초점이 돌아왔고, 체온이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4. 저체온증은 추운 날씨, 겨울 산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저체온증이라고 하면 눈 덮인 산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실제 사고 통계는 다릅니다. 여름 산행 중에도 저체온증은 옵니다. 땀으로 젖은 베이스레이어, 능선에서 부는 바람, 그늘 속 기온, 그리고 오후 늦게 찾아오는 피로. 이 조합은 한여름에도 체온을 빠르게 떨어뜨립니다.

 

여름철 땀은 특히 위험한 요소입니다. 많이 움직일수록 베이스레이어는 젖고, 그 상태에서 바람이 불거나 그늘에앉아 쉬기만 해도 기화열(땀이 피부에서 증발할때 빼앗아 가는 열)이 빠르게 체온을 빼앗아 갑니다.

 

몸이 뜨겁게 느껴지는데도 체온이 떨어지고 있는 상황, 여름 산에서는 충분히 일어날 수 있습니다. 특히 위험한 시간대가 있습니다. 해가 지기 시작하는 저녁입니다. 하루 종일 땀을 흘리며 산행을 마치고 하산하는 그 시간, 기온은 급격히 내려가고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체감온도는 훨씬 낮아집니다.

 

산행 내내 괜찮았다가 하산 후 갑자기 오들오들 몸이 떨리거나, 으슬으슬한 경험 한 번쯤 있으실 겁니다. 그게 저체온증의 초기 신호입니다.

 

 

5. 저체온증을 알아보는 법

저체온증은 단계별로 진행됩니다. 단계를 아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처치의 방향과 구조 요청 여부가 여기서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현장에서는 체온계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수치보다 증상을 읽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아래 체온 범위는 참고용이고, 실제 판단은 눈앞에 보이는 증상을 기준으로 해야 합니다.

 

경증 (참고 체온: 32–35°C)

  • 지속적인 떨림
  • 손발 감각 저하, 손놀림이 서툴러짐
  • 판단력 저하, 말이 느려짐
  • 피로감이 갑자기 심해짐

 

중등도 (참고 체온: 28–32°C)

  • 떨림이 스스로 멈추지 않거나, 아무 처치 없이 갑자기 사라짐. 처치 후 체온이 회복되면서 떨림이 자연스럽게 줄어드는 것과는 다릅니다. 처치 없이 떨림이 멈춘다면 몸이 더 이상 열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는 위험 신호입니다.
  • 의식이 흐려지고 반응이 느려짐
  • 근육이 굳기 시작

 

중증 (참고 체온: 28°C 이하)

  • 의식 저하 또는 소실
  • 맥박이 약하고 불규칙
  • 즉각적인 구조 요청이 필요합니다

 

경증 단계에서 빠르게 대응하면 현장에서 회복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아래 중 하나라도 해당된다면 처치를 하면서

동시에 구조를 요청해야 합니다.

 

  • 의식이 흐려지거나 말이 거의 없어졌을 때
  • 처치를 시작하고 30분이 지나도 떨림이 줄어들지 않을 때
  • 혼자 걷지 못하거나 판단하기 어려운 상태일 때

 

여기서 판단이 다시 중요해집니다. 지금 이 사람이 어느 단계인지 파악하지 못하면, 현장에서 해결될 일을 구조대

가 올 때까지 기다리거나, 반대로 구조가 필요한 상황을 혼자 감당하려다 악화시킬 수 있습니다.

 

6. 현장에서 할 수 있는 것들

저체온증 처치의 핵심은 하나입니다. 열을 더 빼앗기지 않는 것입니다. 열이 빠져나가는 경로는 네 가지입니다. 전도(지면 접촉), 대류(바람), 증발(젖은 옷), 복사(피부표면). 이 네 가지를 차단하는 것이 처치의 전부입니다.

 

현장에서 즉시 해야 할 것들

  • 바람과 비를 피할 수 있는 장소로 이동합니다. 이동 자체가 위험하다면 그 자리에서 차단합니다.
  • 젖은 옷을 건조한 옷으로 교체하거나, 제거 후 이머전시 블랭킷으로 감쌉니다.
  • 지면과의 단열을 확보합니다. 배낭, 여분의 옷, 침낭 커버 모두 활용 가능합니다.
  • 침낭 안에 눕히되, 억지로 움직이게 하지 않습니다.
  • 의식이 있고 스스로 삼킬 수 있는 상태라면 따뜻한 물이나 음료를 마시게 합니다. 단, 알코올은 금지입니다. 혈관 확장으로 오히려 체온이 더 떨어집니다.
  • 사탕이나 당분으로 에너지를 보충해 줍니다.
  • 환자를 혼자 두지 않습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들

  • 팔다리를 문지르거나 강하게 마찰하지 않습니다. 차가운 혈액이 심장으로 갑자기 유입될 수 있습니다.
  • 뜨거운 물로 직접 가온하지 않습니다. 말초 혈관이 확장되며 쇼크 위험이 있습니다.
  • 억지로 일으키거나 걷게 하지 않습니다.

 

7. 여름 산행용 퍼스트에이드 키트

좋은 퍼스트에이드 키트는 가볍지만, 상황에 맞게 구성되어 있어야 합니다. 여름 산행, 특히 계곡 트래킹이 포함된 코스라면 아래 구성을 기준으로 삼아보세요.

 

기본 구성 (사계절 공통)

기본 구성 사계절 공통

품목 용도
탄력 붕대 염좌, 부목 고정
거즈 패드 상처 보호
의료용 테이프 드레싱 고정
라텍스 장갑 혈액 접촉 차단 및 위생
가위 (의료용) 옷 절개, 붕대 자르기
상처 소독액 / 소독 와이프 감염 예방
진통제 이부프로펜 또는 아세트아미노펜. 통증 완화에 사용합니다.
개인 상비약 본인 처방약, 알레르기 약 등

 

여름 추가 구성

여름 추가 구성

품목 이유
이머전시 블랭킷 알루미늄 포일 담요. 저체온증 대응의 핵심. 작고 가볍지만 체온 손실을 90% 이상 차단합니다.
여분의 드라이 레이어 1벌 젖었을 때 교체용입니다. 저체온증 처치의 첫 번째 단계입니다.
방수 배낭 커버 또는 드라이백 키트 자체가 젖지 않게 보관합니다.
모기 패치 또는 벌레 물림 연고 여름 산행에서는 필수입니다.
수포 패드 (블리스터 패드) 여름 장거리 산행에서 발 물집은 흔한 문제입니다.
경구 수분 보충제 전해질 패킷. 탈수와 저나트륨혈증을 예방합니다.
핀셋 가시, 진드기 제거에 사용합니다.

키트는 얼마나 잘 구성되어 있는지, 얼마나 꾸준히 챙겨 다니는지, 그리고 안에 든 것들을 실제로 쓸 줄 아는지가 중요합니다. 아무리 잘 갖춰진 키트라도, 사용법을 모른다면 그건 그냥 짐입니다.

 

 

8. 레이어링은 예방입니다

그날의 사고를 돌아보면, 예방은 한 단계 전에 있었습니다. 젖은 베이스레이어를 입고 쉬는 것. 땀이 마르기 전에 기온이 떨어지는 것. 피로가 누적된 상태에서 식사를 서두르는 것. 이 중 하나만 달랐어도 저체온증은 오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레이어링의 기본 원칙은 간단합니다.

  • 베이스레이어는 항상 건조하게 유지합니다. 땀이 나기 시작했다면 통기 확보가 우선이고, 젖었다면 교체가 먼저입니다.
  • 쉴 때는 미드레이어를 더합니다. 움직임이 멈추면 체온은 빠르게 떨어집니다. 행동이 끝나는 순간 레이어를 추가하는 습관이 저체온증을 막습니다.
  • 여름이라도 쉘 레이어는 챙깁니다. 바람 한 줄기가 젖은 몸을 얼마나 빠르게 식히는지, 한 번 경험하면 알게 됩니다.

레이어링을 아는 것과 레이어링을 실천하는 것은 다릅니다. 귀찮더라도, 무겁더라도. 그 한 겹이 생존과 맞닿아 있습니다.

 

마무리

저체온증은 드라마틱하게 오지 않습니다.

 

서서히, 그리고 조용히 옵니다. 처음에는 그냥 좀 춥고 피곤한 것 같고, 말이 조금 느려지고, 손이 잘 안 움직이는것 같고. 그러다 어느 순간 스스로 판단하기 어려운 상태가 됩니다.

 

그게 이 상황의 가장 무서운 점입니다. 본인은 모릅니다. 그래서 함께 가는 사람이 중요하고, 그 사람이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상한 신호를 읽는 법을, 그리고 그 순간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여름 산행을 앞두고 계시다면, 떠나기 전에 배낭 안을 한 번 더 열어보세요. 이머전시 블랭킷은 들어 있는지, 여분의 드라이 레이어는 챙겼는지, 동행자는 이 내용을 알고 있는지. 그 확인 하나가, 오늘의 산행을 내일도 이어갈 수 있게 만들어 줍니다.

Author

임새결
  • Editor

'Wilderness First Aid' 시리즈 보기

  • 1. Wilderness first Aid, 야생 응급처치 Vol.2 : 그날 여름, 산에서 저체온증은 예고 없이 옵니다
  • 2. Wilderness First Aid, 야생응급처치 방법 Vol.1 : 산에 오르기 전, 나는 먼저 생존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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