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량 백패킹(Backpacking Light)을 의미하는 BPL은 아마도 백패킹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어보았을 단어일 것이다. BPL 스타일에 찬성하거나 반대할 수는 있겠지만 분명한 하나의 백패킹 스타일로 자리 잡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아쉬운 점은 BPL을 팬시한 트렌드로 이해하는 경향이다. 사실 BPL은 단순히 패킹 무게만으로 판단할 수 없는 총체적인 방법론이다. 예를 들어 스테인리스 스틸 소재의 숟가락을 티타늄 스푼으로 교체해 얻을 수 있는 경량화 효과는 불과 10g 내외다. 그러나 백패킹 의자를 가져간다면 배낭 무게는 500g~1kg이 증가한다. 단순히 가지고 있는 장비를 경량 장비로 대체하는 것이 BPL 핵심이 아니다. 필요한 것(need)과 원하는 것(want)을 분별할 줄 아는 게 BPL의 핵심이다.
BPL은 백패킹 스타일 혹은 방법론이지만 심플한 라이프스타일이기도 하다. 백패킹이나 캠핑, 혹은 장기간의 여행을 갔을 때도 짐을 간결하게 꾸릴 줄 아는 사람들이 있다. 간결해 보이는 배낭을 막상 열어보면 필요한 장비가 다 들어있고, 기내 반입이 가능한 아담한 캐리어에는 적재적소에 필요한 소품들이 꺼내기 좋게 수납되어 있는 것을 보면 나는 아름다움을 느낀다. 백패킹의 BPL 스타일은 우리로 하여금 ’간결함의 아름다움’을 깨닫게 한다. 무게에 집착하는 도그마가 아니라 아웃도어 활동과 라이프스타일에서의 간결함! ‘미친듯이 심플’이라는 일관된 방향성으로서 BPL을 재발견하는 즐거움이 여기에 있다.
한국에서는 대략 2010년대 중반부터 BPL을 지향하는 백패커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BPL을 하나의 단순한 ‘유행’으로 간주하는 분위기가 강하며, 값비싼 경량 장비로 대체하는 것을 BPL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BPL이 몇몇 장비를 교체하여 흉내낼 수 없는 팬시 트렌드가 아니라 하나의 독립적인 스타일이자 문화이며, 고정된 방법론(methodology)이 아니라 지향해야 하는 방향성(orientation)이라고 생각한다. 일부 사람들은 BPL을 단지 선택일 뿐이라고 주장하는데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므로 이 주장은 일면 타당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혹시 자연과의 교감을 원하기보다 산에서 더 많은 음식을 먹고, 더 많은 술을 마시겠다는 욕심이 개입된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지난 수십 년간 너무 무겁게 메고 다녔고, 너무 많이 먹었으며, 너무 많이 마셨다.
모든 백패킹이 BPL 스타일이어야 한다는 주장은 일종의 도그마일 수 있으므로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길을 걷거나 야영을 하는 것도 즐거운 일이지만 배낭 무게를 줄이는 습관을 기르는 일, 출발하기 전 미니멀하게 배낭을 꾸리는 일도 그에 못지않은 즐거운 경험이다. 또한 장거리 트레일이 많은 미국에서나 어울리는 방법이지 한국 실정에는 맞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다. 이 역시 타당한 주장이다. 그러나 거친 산악 지형이 대부분인 한국의 자연 환경에는 오히려 BPL 스타일이 어울릴 수 있다. 크고 무거운 배낭 차림으로 가파른 비탈길을 오르고 잡목이 우거진 숲길을 걷는 것은 더 많은 위험 요소를 안고 있다.
흔적을 남기지 않는 BPL은 가장 자연친화적인 백패킹 스타일이다. 일찍부터 BPL이 시작된 미국이나 일본에서도 패킹 무게 기준으로만 BPL을 이해하는 형식주의적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형식주의를 벗어난다면 우리의 BPL은 가장 자연친화적인 백패킹 스타일로 더욱 진화할 수 있을 것이다.
BPL이 우리에게 주는 또다른 긍정적인 요소는 ‘장비 의존성’에서 자유로워진다는 것이다. 백패킹 동호인들의 술자리나 그룹 백패킹을 갔을 때 대화의 많은 부분은 장비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대화를 마치고 돌아와 다른 사람이 가진 장비를 검색하고 장바구니에 담는다. 가볍고 비싼 장비를 갖추는 일에 몰두하고 주변에 자랑하고 싶기도 하다. 새로운 장비를 구입하는 일은 즐거운 일이고, 그것을 테스트해보기 위해 다음 주말에 백패킹을 떠날 생각을 하면 일주일이 신난다. 나 역시 그런 사람 중 한 명이다.
장비를 모두 갖추지 않으면 떠날 수 없는 아웃도어 활동이 있기는 하다. 동계 침낭이 없으면 겨울 백패킹은 감히 엄두를 내기 어렵고, 발에 잘 맞는 가벼운 등산화가 없으면 장거리 하이킹은 괴로운 경험이 된다. 그러나 장비는 모험의 동기가 되지 않으며, 도전은 내면의 자유의지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각자에게 모두 자기만의 모험이 있다. 목숨을 걸고 8,000m 고산을 오르는 전문 산악인들의 모험도 있지만 불필요한 장비를 과감하게 집에 두고 가볍게 떠나는 것도 우리에게는 작은 모험이다. 약간의 모험은 우리의 경험을 더욱 풍요롭게 만든다. 이런 경험이 축적되면 어느새 더 이상 장비에 의존하지 않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 나는 의존성에서 벗어나는 자유가 BPL의 가장 큰 덕목이며,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관계에서 내가 주인이 될 때 비로소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장비로부터 나를 자유케 하면 다음날의 배낭은 더 가벼워지고, 지갑은 무거워질 것이다.
BPL을 하려면 배낭 무게가 반드시 9kg 이하여야 하는가 반문할 수 있다. 나는 이 질문에 망설임 없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물론 BPL 씬에서 권장하는 무게가 있고 나름 기준이 있지만 마치 권투 선수가 경기 전에 계체량을 하듯이 반드시 9kg 이하로 맞추어야 하는 것은 지나치게 교조적이다. 중요한 것은 필요한 장비만을 최소한으로 가져가는 것이다. 그를 위해서는 약간의 경험과 실험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겨울 백패킹을 통해 본인의 추위에 대한 내성이 어느 정도인지를 확인한다면 지나치게 크고 무거운 침낭을 가져가지 않아도 될 것이다.
BPL 은 아주 약간의 연습이 필요한데 몇번의 경험으로 간결한 패킹이 가능하다.
BPL이 쉽지 않은 이유 중의 하나는 우리의 식습관과 관련이 있다. 한국인의 식생활 문화는 서양인의 그것과 많이 다르므로 음식 때문에 짐이 더 무거울 수도 있는데 좀 더 생각해보면 길어야 2박 3일의 백패킹 일정에서 꼭 쌀로 밥을 짓고, 국물을 끓여야 할까? 꼭 산에서 장시간 화석연료를 연소시키며 고기를 구워 먹어야 할까? 그것은 혹시 낡은 관습이지 않을까? 자문할 필요가 있다. 건조 쌀이 아닌 생쌀로 밥을 지을 경우 더 큰 코펠과 더 많은 물이 필요하며, 더 많은 연료가 필요하다. 특히 우리가 선호하는 국물 요리 역시 더 많은 물이 필요하고, 더 오래 끓여야 하며, 그만큼 더 많은 연료가 필요하다. 결정적으로 음식 쓰레기가 남을 가능성도 높아진다. 백패킹 식단을 바꿔보자. 분명히 야영지 저녁을 즐겁게 하는 더 풍미 가득한 레시피가 있을 것이다. 보다 간편하고 가벼운 나만의 백패킹 레시피를 찾는 일은 백패킹의 즐거움을 더 크게 만들어줄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알파미를 베이스로 청양고추를 썰어 넣은 젓갈류나 강된장을 주로 가져간다. 뜨거운 밥에 그냥 얹어 먹어도 맛있고 무게는 몇 십 g 수준이다. 물론 라면도 좋은 메뉴다.
또 처음 경량 백패킹을 시도하는 경우 가장 흔히 놓치는 부분이 의류와 식량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토브나 텐트의 무게에는 관심이 많지만 의류의 무게는 별 관심이 없다. 그러나 의류는 생각보다 무겁다. 얇은 반팔 티셔츠 한 장의 무게가 보통 150g 내외이며, 한 끼 식사를 해결해줄 수 있는 라면 한 개의 무게보다 무겁다. 내 배낭의 무게가 줄지 않는다면 여분의 의류를 너무 많이 챙긴 것은 아닌지 확인해보자. 약간의 불편을 감수한다면 더 가벼워진 배낭은 걷는 내내 더 많은 것으로 보답해줄 것이다.
“Go Light Get More!”
To be continue…
2021년 3월, '인사이드 아웃도어'가 공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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