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그레이 웨일 디자인(Gray Whale Designs, GWD)이라는 브랜드가 생겨났습니다. GWD의 파운더는 다름 아닌 제로그램의 이현상 대표였는데, 제로그램을 떠나 새롭게 시작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꽤 충격이었습니다. 제로그램은 진정성을 가지고 전개하는 몇 없는 국내 브랜드였고, 특히 텐트, 침낭 같은 기어를 만들어 내는 곳은 거의 유일했습니다. 또 국내의 경량 하이킹, 장거리 하이킹 등의 분야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며 관련 문화 전파와 성장에도 크게 기여했습니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그가 떠나 새로운 브랜드를 만드는 것은 시장에서의 큰 이슈지만 잘 다뤄지지 않는 점은 조금 서글프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GWD는 최근 글레이셔 웨일 시리즈의 출시를 발표하며 본격적인 전개가 시작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레이 웨일 디자인과 이번 컬렉션에 대하여 이현상 대표에게 짧은 인터뷰를 통해 알아보았습니다.
제로그램을 나오게 된 것은 무엇보다 투자자와의 의견 차이 때문입니다. 사직서에 '생각차이'라고 딱 네 글자만 적었습니다. GWD는 하이킹 장비를 베이스로 하지만 '재미'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하이킹 장비는 이제 가벼워질 대로 가벼워졌거든요. 흥미를 잃지 않는 게 개발자나 고객이나 다 중요한 거 같아요.
Gray whale Designs
바다에 사는 대형 포유류라는 점에서 평소 고래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진화생물학자들에 의하면 육지에 살던 고래의 조상이 대략 5,500만 년 전쯤 바다로 되돌아갔다고 해요. 모든 생명은 바다에서 기원했는데 왜 다시 바다로 되돌아갔을까... 아마도 당시 생태계에서 고래는 낙오자였거나, 모험적인 혁신가였거나 했을 거예요. 이 두 가지 느낌을 다 좋아합니다. 정서적으로 마이너 리그나 비주류에 대한 유대감이 많은 편이면서 한편으로는 '똑같은 것'을 못 견뎌하는 성격이기도 합니다.
그중 그레이 웨일, 한국에서는 귀신고래라고 부르는데 1970년대까지만 해도 울산 앞바다까지 회귀했다고 해요. 그 후에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죠. 우리나라의 동해에서도 그레이 웨일을 다시 봤으면 좋겠다, 뭐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참, 고래는 1년에 20,000km를 회귀합니다. PCT의 네 배나 되는 거리인데 엄청난 장거리 하이커죠.
Glacier Whale Series
사실 이번 글레이셔 웨일(Glacier Whale) 시리즈는 모두 이태한 님(@taehan.lee)이 디자인했고, 백팩을 제외한 제품은 직접 수작업으로 제작했어요. 이태한 님과는 제로그램에서 근무할 때 서로 인사를 나누었는데, 그 첫 만남에서 언젠가는 같이 작업할 일이 있을 거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이번 협업에서 저는 개발 샘플에 대한 리뷰와 원단 소싱, 제품 공장 섭외 등과 같은 허드렛일을 맡았죠. DYNEEMA나 Dimension-Polyant와는 오래전부터 거래했던 경험이 있어서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각자 맡은 역할에 대해 최대한 간섭하지 않고 진행했습니다.
이태한 님은 자기가 만든 결과물에 대해 강박관념이라고 표현해도 될 정도로 철저한데, 그런 열정이 함께 콜라보를 하게 만들었고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취미로 MYOG에 관심을 가진 것과 시장에 내놓는 '상품'을 만드는 것과는 전혀 다른 성격인데 끝까지 협업을 잘 마치게 된 거 같아 흡족합니다.
GWD는 Essential Gear에 집중할 생각이므로 당연히 텐트와 침낭 개발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이런 생각이 들어요. 장거리 하이킹을 갈 때 꼭 그렇게 초경량만 고집해야 하나, 우리는 혹시 weight weenie는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요. 사실 요즘은 소재들이 정말 많이 좋아져서 가벼우면서 충분히 개성이 강한 텐트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 그리고 텐트나 침낭은 내년 5-6월쯤 목표를 가지고 스케치를 하고 있습니다.
원래는 전혀 다른 콘셉트의 '여행(journey)'를 기획했었습니다. 웨일 워칭(Whale watching)과 하이킹을 연계하는 그런 여행인데요, 장엄한 경관의 트레일을 걷는 것과 바다를 유영하는 신비로운 고래를 보는 일은 모두 대단한 경외심을 경험하게 합니다. 좋은 여행은 경외심의 충만이라고 생각해요. 울산 앞바다에 고래가 돌아온다면 해파랑길을 걸으면 되겠지만 언제일지 모르고, 오리건 코스트 트레일(Oregon Coast Trail)이 좋은 대상지가 될 거 같습니다. 뭐 내년도 쉽지 않겠지만요. 하이킹 이벤트도 생각 중입니다. 그런데 경외심, 낯선 자아의 발견 뭐 이런 경험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아직 그게 어떤 유형일지는 딱히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레이 웨일 디자인과 이태한의 협업 컬렉션인 글레이셔 웨일 시리즈는 배낭, 전용 라이너, 드라이 색, 스터프 색, 보틀 파우치 등 총 5지로 구성됩니다. 이번 컬렉션은 DYNEEMA® Composite fabric(DCF)이 공통적으로 사용된 것이 눈에 띄며 컬렉션의 이름과도 잘 어울리는 느낌의 소재로 생각됩니다. 출시는 10월 19일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제품의 자세한 정보는 GWD에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강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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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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