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였더라? 마지막으로 제주를 찾은 것은 2007년 무렵이었을게다. 대학 시절에 수행여행 쯤으로 한번 다녀온게 전부이니 사실 제대로 제주를 다녀왔다고 할 수는 없다. 한라산은 근처에도 가지 않았었다. 작금의 제주도의 인기는 뜨겁다. 늘 마음엔 있지만 최근 제주도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은 선뜻 다가가기 어렵게 했다. 그런 와중에 이번 오티티(Ott, On the trail)가 한라산을 배경으로 하여 제주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번엔 망설일 이유가 사라졌다. 근 12년만에 제주에 간다. 그것도 여자친구와도 한 번 가보지 못한 제주를.
퇴근하고 김해공항에서 금요일 저녁 비행기로 출발해 제주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또 한시간여 이동해야 하는 긴 여정이다. 집결지와 가까운 돈내코야영장에서 하루 묵을 생각이었다. 버스를 내리고 생각보다 한참을 걸어서 야영장에 도착한 건 밤 11시 쯤. LMHC 멤버인 민교형님이 맞아주었고 부시럭거리는 소리에 재훈형님도 텐트에서 나와 맞아주었다. 고마웠다. 불과 몇달 전인 지난 오티티 때만 해도 우리는 전혀 서로의 존재를 몰랐었거나, 인스타그램 이웃 정도로 지나치는 사이였는데 함께 하이킹 하면서 꽤 가까워졌다.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하지만 드디어 내일로 다가온 [오티티 한라]에 다들 잔뜩 기대감으로 부풀어서 한참동안 얘기를 나누다가 자정이 한참 넘어서야 각자 텐트로 돌아갔다. 정말이지 긴 하루다.
돈내코야영장에서 집결지인 서귀포충혼묘지까지 걸어서 이동하면서 저만치 보이는 한라산 꼭대기에는 마치 모자를 쓴 듯 구름이 길게 걸려있는게 마냥 평화로워 보였다. 출발지에서 평궤굴을 지나 남벽통제소까지는 꾸준히 고도를 올려야 한다. 금방 흐르는 땀에 자켓을 넣고 반팔차림으로 오르고 있는데 남벽에 가까워지자 느닷없이 칼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한다. 몸이 휘청거릴 정도의 바람과 추위에 다들 적잖이 당황한 눈치다. 평화로워 보이던 구름이 속은 이렇게 까칠할 줄이야.
남벽은 정상에서 하단까지 수직고도가 300m나 되는 우리나라 최대의 암벽이다. 광활한 제주 중산간지대 위로 우뚝 솟은 남벽을 눈 앞에 두고 너 나 할 것없이 감탄사가 이어진다. 하지만 구름에 둘러쌓여 남벽은 쉽사리 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남벽탐방로 지역은 한라산에서 유일한 너덜지대라고 한다. 짙은 회색빛의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너덜길을 한참 걷다보면 이 곳이 한라산이라는 걸 새삼 느끼게 한다. 확실히 육지의 산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장갑을 준비해야 한다는건 생각도 못했다. 주머니 속에 손을 찔러 넣고 강한 바람 속에서 비틀비틀거리며 꽤나 오랫동안 계속되는 너덜길을 걷다보니 발바닥과 발목도 금새 너덜너덜해졌다. 아직 오늘 걸어야 할 30km 중에 1/3도 걷지 않았는데.
출발지로부터 약 10km 지점인 윗세오름 대피소에 도착했다. 윗세오름 대피소 건물에서 따끈한 컵라면 하나 사먹는 생각에 간절했는데 아쉽게도 영업을 하지 않는다. 출발지에서 나누어 준 김밥을 이제서야 꺼내보았다. 추위때문에 김밥은 거의 얼기 직전이다. 차가워진 김밥 덕분에 허기와 갈증을 동시에 해소할 수 있었다. 잠시 몸을 녹이려고 들어간 대피소 건물 안은 앉을 자리 하나 없이 인산인해다. 들어서자 마자 안경알이 금새 뿌옇게 될 정도로 사람들의 체온으로 데워져 있었다.
중학교 때 부터 친구인 명진이는 유일하게 하이킹을 함께 하는 친구다. 남벽까지 오르는 서너시간 남짓의 시간이 힘들기도 했겠지만 생각지도 못하게 추웠기도 했고, 딱히 음식을 먹을만한 포인트가 없었기 때문에 허기짐에 남벽 통제소 부근에서 그는 드러누워버렸다. 평소 하이킹 갈 때 마다 농담삼아 볼멘소리하는게 습관인 녀석은 이번에도 걷는 내내 입버릇처럼 얘기한다. '아, 그냥 집에 있었으면...지금 쯤 피자나 시켜놓고..' 한라산 중턱에서 이제와서 하기엔 아무의미 없는 푸념일 뿐이다. 남벽을 지나 영실코스를 내려오는 동안 바라본 한라산의 거대한 위용은 이런 쓸데없는 상상을 싹 가시게 했다.
CP에서 재훈형님(@habitmind) 부부와 함께
윗세오름 대피소에서 영실코스로 내려오는 동안 어느새 구름이 걷히고 다시 해가 비친다. 추위에서는 벗어났지만 계속되는 내리막에 다리가 저릿해 질 때 쯤 영실코스 입구에 도착했다. 매점을 그냥 지나치기는 아쉬웠다. 오뎅탕을 한그릇 시켰는데 비싸고 볼품없는 오뎅탕이었지만 순식간에 비웠다. 이 맛에 일부러 고생을 사서하는게 아닌가 싶다.
영실입구에서 한라산 둘레길로 이어지는 4km 정도의 도로구간을 지나 CP에 도착한 건 통과제한시간인 오후 4시 30분이 거의 다 되었을 무렵. CP에서 야영장까지는 아직 10km 이상 더 가야한다. “이제 편한 길로 두시간 반 정도만 더 가면 되요.” 스텝의 말에 따뜻한 저녁식사를 곧 할 수있다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CP에서 야영장까지는 10여 킬로미터 되는 천아숲길을 지난다.
갑자기 들이닥친 어둠
이미 한차례 참가자들이 지나간 천아숲길은 인적없이 고요했고 앞 뒤로 간격이 꽤 벌어졌는지 한참동안 참가자들을 마주치지 못해 온전히 둘만의 숲길이 되었다. 10월 말의 천아숲길은 단풍이 절정이다. 무성하게 펼쳐진 조릿대며, 나무 사이로 들이치는 늦은 오후의 볕이 아름다웠다. 편안한 숲길을 지나서 편백숲으로 들어설 때 쯤 느닷없이 컴컴해져서 황급히 헤드랜턴을 꺼내들었다. “난 야영장 도착. 자리잡고 있을테니 조심히 와요” 여섯시 무렵, 민교형님에게 카톡이 왔다. 아직 우리는 한시간 반은 더 가야할 것 같은데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곧 텐트 불빛들이 나타날 때가 되었는데..’ 라고 생각한지 한참이 지나서야 저 멀리 피니쉬라인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른 참가자들보다 조금 늦은 우리들에게 스텝들은 큰 환호성으로 반겨주었다. 어리둥절해 있는데 가까이서 보니 이번에 스텝으로 참여한 CAYL의 의재형이었다. “왜 이렇게 늦게왔어요? 고생했어요.” 코스 마지막 쯤에 이정표가 사라져서 길을 한참 헤맸다고 둘러대긴 했지만 오뎅탕 먹느라 늦은 건 비밀.
오티티 2일차 아침에 빠지지 않는 ‘코너 속의 코너’ 가 있다. 송영훈(@song2_) 커피타임인데, 이번에는 장소가 장소이니 만큼 커피 대신 제주영귤차가 제공됬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시간인데다가 피곤할 법도 하지만 참가자들은 부스스한 모습으로 각자의 컵을 들고 텐트 밖으로 나오기 시작한다. 백패킹용 스토브와 포트를 이용해서 수십명이 먹을 차를 끓여내는 모습은 오직 오티티에서만 볼 수 있는 광경이다.
LMHC 멤버들과 함께
이번 [오티티 한라]의 야영장은 원래 야영장으로 사용되는 곳은 아니다. 평소에 일반인이 드나드는 곳도 아니고 올 만큼 알려지지도 않은 곳이다. 이번 오티티 한라를 위해서 특별하게 단 하루만 허락된 장소인데, 이번 오티티의 특별함을 더했다. 나처럼 사진을 좋아하는 하이커들은 야영지의 아침풍경을 담기 위해 부지런히 일어나서는 연신 셔터를 누른다. 다시 이 곳이 하이커들의 텐트로 가득한 모습을 볼 수 있을까? 따스한 영귤차로 여유로운 새벽을 보낸 하이커들은 동이 트기 시작하자 분주해진다.
야영지에서 도착지까지는 이제 10km만 가면 된다. 녹고메 오름에 오르기 위해 잠깐 가파른 계단을 올라야 하는 것만 빼면 아주 편안한 길이다. 녹고메 오름에 오르자 사방으로 시야가 트이면서 가슴도 탁 트인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숲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다. 어제 단풍 구경을 실컷했는데 오름에 오르자 이번엔 억새다. 제주에서 가을을 만끽했다.
1박 2일 40Km를 무사히 완주했다. 아침에 먹은 진통제가 효력이 다했는지 왼쪽 무릎과 엉덩이 쪽이 다시 시큰거린다. 도착지점에 주저앉아서 뒤이어 도착하는 참가자들을 구경했다. 통증 때문인지 무릎이 거의 굽혀지지 않는데도 끝까지 완주하신 여성분도 있었다. 대단했다. 짐을 줄일대로 줄인 나와는 다르게 80리터 이상의 배낭을 메고도 끄떡없이 완주하시는 분들을 보니 절뚝거리는 내가 괜히 부끄러운 생각도 들었다. 마지막 참가자가 도착할 때는 나도 일어나서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그렇게 1박2일 40km의 오티티한라는 끝이 났다.
영화용어를 빌리자면, 숏(shot)이 모여 씬(Scene)이 되고 몇 개의 씬이 모이면 그게 시퀀스가 된다. 시퀀스는 시작, 중간, 결말의 구성을 가지면서 극의 절정으로 마무리된다. 이번 [오티티 한라]는 돈내코 코스를 시작으로 남벽과 영실을 지나면서 가장 큰 임팩트를 남겼고, 천아숲길을 지나 비밀같은 야영장에서의 하룻밤은 힐링 그 자체였으며, 둘째날 가벼운 마음으로 녹고메 오름에 올랐을 때 탁 트인 풍경은 그야말로 완벽한 시퀀스였다.
이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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